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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전작들과 다르다… '도망친 여자'가 멈추는 곳은 어디인가

이청훈T님 | 2020.10.05 13:14 | 조회 549
글                                              김병규(영화평론가)                                             2020-09-29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라인]                        

홍상수의 신작을 보고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영화가 너무 훌륭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너무 투명한 나머지 어떤 분석적 용법도 무효하게 만들것 같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런데도 무언가 덧붙일 말이 남아 있을까 고민해보았다.

평면의 침묵

<도망친 여자>

극장을 나선 감희(김민희)는 골목에 잠시 멈춰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걸어왔던 건물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다음 장면에서 아무도 없는 극장 내부로 들어서면 그녀가 바로 직전에 보고 들었던 흑백영화의 한 장면과 음악이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기묘하게도 이번엔 흑백이 아니라 컬러의 형태로 스크린에서 상영되지만 말이다. 카메라는 영화를 보는 감희의 눈빛으로부터 천천히 움직여 파도가 이는 바다의 풍경으로 가득 채워진 스크린을 들여다본다. 이것이 <도망친 여자>의 마지막 두 장면이다.

홍상수 영화의 결말에서 골목을 향해 걸어가는 인물들의 걸음을 포착하거나, 극장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는 인물의 눈짓을 담아내는 것은 그다지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감희는 그런 익숙한 몸짓들 사이를 생경하게 오가며 어느 쪽으로도 위탁되지 않는 유예된 선택을 취한다. 감희는 영화를 보러 돌아온 걸까, 아니면 극장 바깥으로 부터 도망친 걸까.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컬러 화면의 이 영화는, 조금 전에 보았던 흑백 화면의 그 영화와 같은 것일까. 그런데 왜 두 영화는 같은 장면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걸까.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경로로 이곳에 도달한 것일까? 애당초 영화가 시작하긴 했던 걸까?

홍상수의 24번째 장편영화인 <도망친 여자>는 일견 지나치게 간결하고 단순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차라리 홍상수 영화를 지탱하는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생략했을 때 남겨진 것들로 무엇이 성립하는지 가늠해보는 일종의 구조적 변조같이 다가온다. 구체적으로 따져봐도 <도망친 여자>에는 홍상수의 영화를 이루던 많은 조건이 탈각되어 있다. 물리적인 의미에서든, 내러티브의 차원에서든 여정과 관련된 시간을 다루던 홍상수의 여느 영화들과는 달리 <도망친 여자>는 일상적 잉여에 가까운 시간- 감희의 설명을 빌리면 남편이 출장을 떠나고 홀로 남은시간- 을 느슨하게 비추고 있다. 주인공을 둘러싼 문제적 상황이나 특별한 사건이랄 것은 없으며, 이례적인 형식적 시도가 두드러지는 것 또한 아니다. 심지어 술과 담배와 같은 사물들의 존재감마저 희미하다(따라서 만취한 이들도, 그런 이들이 펼쳐 보이는 충동적인 말과 행동도 구현되지 않는다). 두번의 예정된 만남과 한번의 예정에 없는 마주침이 세 단락으로 나뉘어 있는 구조 속에서 거의 모든 장면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명확하고 투명하게 나열된다.

그 집에 3층이 있었던가?

이토록 투명한 평면 위에서 무엇이 작용하고 있을까. 역설적으로 <도망친 여자>의 화면은 시각적 대상의 결핍으로 가득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범람이라는 모순적인 표현이 허락된다면 이 영화 속 숏들의 생김새 앞에서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싶어진다. 영순(서영화)과 영지(이은미)가 사는 집과 그 주변을 떠올려보자. 그곳은 닭을 키우는 옆집과 얼마 전 이사 온 부부가 사는 건너편의 이웃집과 엄마가 도망갔다는 젊은 여자가 사는 앞집을 주변에 두고 있지만, 정작 화면에 비치는 장소는 영순의 집 실내 일부와 마당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충돌을 일으키고, 시선과 동선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는 것은 이처럼 다른 장소와 몽타주를 형성하지 않는 단독적인 평면에서다. 그들은 바로 이곳에서 몇 마디 말을 통해 화면에 비치지 않는 자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이지만(출장을 떠난 감희의 남편, 닭을 기르는 옆집 사람들, 고양이를 무서워한다는 이웃집 남자의 처, 앞집 젊은 여자의 부모), 이들의 모습은 결코 카메라 앞에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누군가에 대한, 또는 어느 장소에 관한 말이 흘러넘치는 것과는 반대로 화면은 그것들의 부재를 환기하는 장소로 절반의 여백을 내재한 채 지속되는 것이다.

기묘하게도 이곳은 하나의 영화적 장소로서 입체적 두께를 덧대려는 움직임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거실 소파에서 자다 깨어난(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집은 오직 거실과 주방으로만 분할되어 있다. 감희는 시간의 경과가 누적되지 않는 몸으로 방이 없는 서로 다른 집들을 떠돈다) 감희는 영순에게 느닷없이 ‘3층의 비밀’에 관해 묻는다. 관객인 우리로서는 맥락을 알 수 없는 황당한 말이다. 이 집에 3층이 있었던가?

게다가 그곳의 비밀에 대해 캐묻는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 공공연히 언급되지만, 절대 드러나지 않는 집의 3층에 대해 속삭이는 감희의 언술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1부에서는 나타나지 않다가 2부에서야 등장하는 희정의 집 옥상,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시제를 분간할 수 없는 파티가 열린 호텔 옥상을 떠올리게 하며 홍상수 영화의 ‘위층의 비밀’(그의 영화의 위층은 아래층과 접합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에 접근하고자 하는 미묘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그 두 영화와는 다르게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로 이행하는 움직임에 따라 이야기의 질서에 변형을 가하는 힘이 억제된 <도망친 여자>의 평면에의 강박을 돌연 폭로하는 진술이 된다. 영순은 그저 3층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 더러우므로 그곳을 보여줄 수 없다고 대답하지만, 그건 이 영화의 전경에 드리운 몽타주의 불능이라는 근원적인 곤경과는 무관한 답변일 터이다. 그들은 3층으로 향하지 못한다. 그리고 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영순의 말과는 다르게 이는 치명적인 조건으로 감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세개의 단락으로 나뉜 영화의 구성이 지시하는 것은 이러한 평면성의 동어반복이다. 숏은 평면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통념과 달리 여러 개의 다른 평면과 결부되어 영화적 장소로서 부피를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도망친 여자>를 보면서 의문이 솟아오르는 건 눈앞의 공간을 프레임에 담긴 영화적 장소로 변용하기 위해 시도되는 데쿠파주의 가장 기본적인 용법에 대해서다. 감희는 위로 올라갈 수도,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다. 심지어 발걸음을 움직여 다른 곳으로 나가고 들어서는 일조차 쉽지 않은 엄격한 역학적 구속에 붙들려 있다. 수영(송선미)이 그녀에게 근처에 재밌는 술집이 있다는 말을 전하고, 집 위층에 만나는 남자가 산다고 이야기하지만, 카메라는 어떤 곳으로도 동행하지 않는다.

눈앞의 ‘여기’에서 ‘저기’라는 다른 구역으로 이행하는 순간은 수영의 집 내부의 거실에서 부엌으로 향하는 잠깐의 움직임으로 주어질 뿐이다. 수영이 사는 집의 거실과 부엌은 터무니없이 가까운 위치에 근접해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도대체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건지 지각적으로 분간할 수 없도록 나뉘어 찍혔다(하나의 예시로 프라이팬에 올려둔 음식이 구워지는 소리는 부엌을 시끄럽게 뒤흔들지만, 수영과 감희가 대화를 나누는 거실에까지는 가닿지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가 그런 장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마주치고, 외면하고, 기다리고, 재회하는 몸짓과 시선을 산출하는 것이었다면, <도망친 여자>의 (과다한) 말과 (과소한) 몸짓들은 그러한 영화의 작동원리를 불현듯 소진해버리는 강박적인 변주로 영화 전체에 번져간다.

<도망친 여자>

<도망친 여자>는 이 복수의 평면들을 수평적으로 배열해두면서 영화적 깊이라는 허구적 규범을 모두 지워나간다. 평면은 선형적인 시간의 구분으로 정돈되지 않고(세개의 에피소드는 연속적인가? 독립적인가? 감희는 영순의 집 마당에 걸려 있던 우산과 같은 종류의 우산을 들고 수영의 집에 찾아간다. 그런데 마당에 걸린 우산과 감희의 손에 쥐어진 우산이 같은 사물인지, 그것이 시간상으로 연속된 상황인지 분명치 않다), 인물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정돈된 맥락의 서사로 수습되지도 않는다(감희와 주변 인물들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는 반복되는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말을 통해서만 전해지며 끝내 불명확한 인식으로 남겨진다). 이제 스크린은 급진적으로 평면화될 것이다. 화면의 세로축으로 마주 선 남자의 뒷모습과 여자의 얼굴은 자연스러운 대화라기보다는 추상적인 구도로 환원된다. 이따금 카메라의 시선에 포착되는 산의 풍경은 인물의 정서와 관계하거나 누군가의 응시로 인해 감응을 일으키는 대상이 아니라 단지 눈앞에 보일 뿐 아무런 속성도 부여되지 않은, 깊이를 관측할 수 없는 표면적인 대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평면과 또 다른 평면. 하나의 평면의 옆에 혹은 뒤에 그와 별개의 평면이 나란히 병치되고 있다. 그러므로 감희의 역할은 평면의 자리에서 또 하나의 평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창문 너머의 풍경과 폐쇄회로 화면의 모니터, 최종적으로는 영화관의 스크린이라는 평면의 벽을 말이다. 이때 감희의 눈빛은 모호하다. 내가 발을 디디고 선 이곳과 눈앞에 보이는 또 다른 평면으로서의 저곳이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인 걸까? 이것은 몽타주가 실행되지 않는 영화의 장소에서 배회하는 폐쇄된 주체의 유일한 역량이다.

통상적인 영화에서 프레임의 내부와 외부는 존재론적으로 다르지 않다. 화면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일 뿐 잠재적으로 그곳에 있다. 영화의 인물들은 그렇게 프레임의 안팎을 넘나들면서 동선을 만들어내고 영화적 장소를 형성하며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도망친 여자>의 감희는 그런 기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다. 그녀는 영화가 펼쳐지는 모든 곳에 입회하지만, 어느 방향으로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기는커녕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모든 장면마다 평면이라는 가시적인 틀에 갇혀버린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도망친 여자>에서 가장 기묘하게 느껴지는 몸짓은 어딘가로 들어가거나 어딘가로부터 나올 때마다 감희가 반복하는 뒷모습이다. 골목을 향해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영화가 시작하면서 영순의 집에 도착했을 때도, 수영의 집에서 나올 때도, 마지막으로 우진(김새벽)이 일하는 극장을 걸어 나오면서도 유사한 자세로 화면에 각인된다.

감희의 뒷모습은 이중화된 몸짓을 구축하게 된다. 영화의 메인 포스터로도 사용된 그 자세만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감희의 몸짓이 내부로 들어서기 위한 걸음인지 외부로 나서는 걸음인지 확언할 수 없다. 거의 모든 장면이 투명한 평면으로 수렴되는 이 영화에서 역설적으로 아무런 자극 없이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형상이 평면적 장면으로 환원되지 않는 영화의 시간을 일시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서두에서 길게 묘사한 영화의 마지막 두 장면이 전해주는 놀라움은 이런 부분에 있을 것이다. 감희는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영화관에서 친구 우진을 우연히 마주친다. 우진은 건물 지하에서 감희의 옛 연인이자 자신의 남편인 정 선생(권해효)의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고 전해주는데 물론 감희는 그곳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아래까지 도달할 수 없을것이다. 대신 그녀는 “위층에 우진이랑 있다가” 내려오는 길에 정 선생을 마주친다. 마치 만나선 안될 사람들을 본 것처럼, 감희는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는 말을 내뱉고는 바깥으로 나온다. 그리고 골목을 앞에 두고 예의 뒷모습으로 잠시 멈춰 선 뒤 걸음을 돌려 극장으로 향한다.

마침내 감희가 도착한 곳

홍상수의 영화에서 카메라 혹은 정지된 사진적 이미지가 주요한 소품과 형상으로 출현한다는 점은 이미 적지 않은 평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북촌방향>의 마지막 장면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하루에 도착한 성준(유준상)을 냉담하게 붙들어놓는 이름 모를 여자의 카메라,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인물과 세계의 동일성에 변형을 일으키는(클레어의 말을 빌리면 “내가 당신을 찍은 후에는, 당신은 더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클레어가 든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권능. 또는 <하하하>의 도입에 등장하는 두 남자의 정지된 흑백사진, <클레어의 카메라>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정지 화면, <풀잎들>의 결말에 제시되는 카페 안팎의 정경을 담은 세장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홍상수는 카메라와 사진(찍기)의 힘을 빌려 정지된 이미지를 영화의 육체에 기입하고 물들인다. 그런 사진적 형상의 도입을 통해 홍상수의 영화는 영화 자체에 부여된 오랜 관습과 부자유를 마주하고 그 모두를 지탱하는 용법의 관례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재구성해낸다.

그런가 하면 그의 영화에서 정지된 사진적 육체에 대항하는 하나의 형상 또한 떠올려볼 수 있다. 그건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는 김민희의 신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전례 없는 형태로 출연을 이어오는 이 모델은 특별하게도 누군가가 만든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서기를 반복한다. 영화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독립적인 두개의 서로 다른 세계에서 발생한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무한히 열어둔 채로 영화를 매듭짓거나(<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영화를 시작점으로 되돌린다(<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 놀라운 장면들은 어떻게 보더라도 영화라는 육체를 일깨우는 강력한 기제가 된다. 홍상수의 최근작에서 사진,카메라, 정지된 이미지가 나올 때마다 우리가 새삼 확인하는 것은 사진적 형상이 이와 같은 영화적 세계가 나누는 긴장과 협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도망친 여자>의 스크린은 조금 다른 사태를 지시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극장을 나서는 감희의 뒷모습에서 끝나지 않고 그녀를 극장으로 되돌린다. 그곳에서 한 차례 보았던 영상과 몇번이고 들렸던 음악이 감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앞서 밝혔듯이, 감희가 바라보던 대상은 영화적 세계로 활성화되지 않는 평면의 다른 형상들이다. 우리를 끊임없이 예전으로 되돌리는 반복적 시간이 이렇게 지연되면서 끝내 도래한다. 스크린에 비친 영상을 바라보며 카메라는 움직임을 통해 정지를, 유동적인 반복으로부터 응고를, 마침내 영화의 시간을 잠식한 사진적 정지를 직시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영화는 극장에 들어선 감희와 함께 마무리된다. 그런데 감희가 도착한 곳은 바깥과 다른 것을 증명할 수 없는 스크린이라는 평면의 영역이다. 그녀는 안으로 회피한 것도,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것도 아니다. 단지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할 수 없는 평면이라는 같은 자리에 몇번이고 되돌아온 것이다. 영화는 이곳에서 끝난다. 하지만 우리는 시작한 곳과 끝나는 곳이 얼마나 다른지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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