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나홍진 감독, 내 본연의 모습 끌어내줬다" 손강국

꿈별달해눈비님 | 2016.06.14 12:28 | 조회 531


        
                            



안내상, 정재영, 이종혁, 이문식, 우현…이 배우들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연극 <라이어> 출신이라는 것이다. 1998년 국내 첫 무대에 올라 올해로 19년을 맞은 <라이어>. 이 연극무대에서 탄생한 유명배우들의 명단에 또 하나의 이름이 추가될 듯하다. 최근 숱한 화제 속에 32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곡성>에서 곽도원의 동료형사 오성복으로 분한 손강국의 이름이다. 곽도원, 황정민, 쿠니무라 준 등 쟁쟁한 배우들 속에서도 지지 않고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낸 배우, 대학로 대표 연극 <라이어> 무대를 10년 넘게 지켜왔을 뿐 아니라, 지금도 주 8회 이상 무대에 올라 땀 흘리며 자기만의 연기를 다져가고 있는 손강국을 만났다.
 
* 영화 <곡성>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Q 얼마 전까지 영화 <곡성>으로 무대인사를 다녔다고 들었다.
그렇다. 그동안 잠깐 <라이어>에 양해를 구하고 공연에서 빠졌다. 촬영은 2014년에 했는데, 거의 1년 가까이 영화에 매진했다. 촬영 6개월 정도 하고, 편집을 기다렸다가 후시 녹음까지 포함해서 거의 1년은 <곡성>에 매달린 것 같다.

Q 개봉하고 나니 소감이 어떤가.
편집본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처음 읽었던 시나리오나 생각했던 것들을 감독님께서 파격적으로 편집하셨더라. 영화를 하면서 느낀 것은 나홍진 감독님은 정말 천재라는 거다. 촬영할 때는 배우의 밑바닥에 있는 것까지 끌어내는 능력이 있고,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를 봤을 때도 정말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힘이 있다. 깜짝 놀랐다.

영화가 개봉한지 이제 1주일 정도 되어가는데, ‘스포’가 영화에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누가 범인이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다 하는 관객 분들의 의견이 되게 많은데, 그런 걸 듣고 나서 영화를 봐도 아무런 스포일러가 되지 않더라. 참고로 와이프가 임신 7개월인데 영화를 두 번이나 봤다. “아빠가 일한 거니까 괜찮아, 이건 연기야”하고 최면을 걸면서 보더라(웃음). 와이프 말에 의하면 처음 볼 때와 두 번째 볼 때 시각이 달라지고, 나홍진 감독이 뿌려놓은 소스들을 더 많이 찾게 된다고 하더라. 우리 영화는 두세 번은 봐야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웃음).

Q 나홍진 감독과는 <황해>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곡성>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 황해>에서도 시골 경찰이었는데, 거기서 뭔가를 보셨나 보다. 그래서 <곡성>을 시작하실 때 전화를 주셨다.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그 뒤로 계속해서 한 일곱 번을 부르시더라.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하시더니 결국은 같이 하자고 하셨다. 

Q 전보다 비중이 큰 역할을 맡아서 부담도 컸을 것 같다.
내가 연기생활을 한지 24년째다. 연기에 대한 부담은 이제 별로 없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어렸을 때는 동창회에서 만난 녀석들이 “야 근데 너 뭐 먹고 사냐? 연극한다면서? 뭐 먹고 사냐?”하면 “네가 나 먹여 살려줄 것도 아니잖아”하면서 많이 싸웠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그냥 이렇게 말한다. “너 출근하듯이 나도 출근하고, 네가 생활하듯 나도 생활한다. 대신 넌 대기업 들어가는 게 꿈은 아니지 않았냐. 근데 난 내 꿈도 이루면서 먹고 산다.” 그러니까 괜히 내가 승자가 된 기분이 들더라(웃음).

물론 이번에 비중도 커졌고,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거다. 그렇지만 그냥 내 일을 하다 보니 기회가 왔고, 스스로도 준비가 됐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다. 부족한 부분들은 감독님이 끌어주셨고, 곽도원 씨는 원래 친구인데, 영화 쪽으로는 나보다 선배니까 많이 이끌어줬고.
 



Q 오성복이라는 시골 마을 경찰을 연기하기 위해 연구했던 것들은.
나도 고향이 시골이고, 실제로 지인 중에 시골에서 경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전화하거나 직접 찾아가서 많은 얘기를 들었다. 동네에서 할아버지들이 술 취하면 어떻게 처리하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따라가서 같이 순찰도 돌아보고, 파출소에 서너 시간 있어보고.

그런데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감독님이 내 본연의 모습을 더 좋아하시고 그걸 끌어내시더라. 경찰이라기보다 그냥 동네 총각, 동네 청년 같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효진이의 삼촌이고, 경찰로서 추리력은 빵점인(웃음) 모습을 원하셔서 그런 쪽으로 연구를 많이 했다.

Q 오성복은 후반부에 왜 그렇게 되는 건가.
결국은 눈에 보이는 진실, 증거들을 믿다 보니 나(오성복)도 그쪽에 현혹돼서 나가는 거다.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내 눈 앞에 펼쳐진 증거들, 효진이의 신발 같은 걸 봤을 때 경찰로서가 아니라 그냥 오성복이라는 한 인물로서 (외지인이) 범인이구나, 우리 효진이 어떻게 하지? 생각하다 보니 계속 의심하게 되는 거다. 의심이 계속 쌓이다 보니 헛것을 보게 되고, 그 헛것이 내게는 진실로 다가오고.

처음에는 오성복이 종구를 놀리지 않나. 그러면서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결국엔 내 눈 앞에 펼쳐진 증거들을 보고 믿음이 생겨버린 거다. 그래서 결국은 헛것을 보는 거지. 내게는 헛것이 아니라 진실이지만. 그래서 내 눈 앞에 있는 귀신을 처리했고, 그런데 그 귀신이 주인집 할머니였고. 그렇게 된 거다.
 



사실 감독님도 배우들한테 정확한 답을 주시지 않았다. 배우가 보는 것만 믿으라고 하셨다. 시사회 때 배우들끼리도 “넌 어떻게 생각해?” 하고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 서로 생각이 다 달랐다. 배우들도 각자 보고 생각하는 것들이 다 다르고, 그것들이 서로 부딪치고, 관객들은 거기서 재미를 느끼는 거다. 영화를 본 지인들이 전화를 많이 한다. 누가 범인이고,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냐고. 근데 얘기를 못해주겠더라.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니까. 그래서 “네가 본 게 정답이야”라고 하면 “맞을래?”라고 한다(웃음). 나도 영화를 두 번 봤는데, 처음에는 안 보였던 것들이 두 번째에 보이면서 연결고리들이 만들어지더라. 영화를 찍은 배우로서가 아니라 관객으로서도 이런 영화는 처음이다. 재미있고 되게 신선하다.

Q 실제 현장에 동물의 사체도 있었다고. 나홍진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굉장히 치열하다고들 하던데 직접 겪어본 바로는 어땠나.
정말 꼼꼼하시다. 모든 스텝들이 배우의 동선에 맞춰주길 바라셔서, 배우로서는 연기하기가 너무 좋다.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으니까. 동물 사체뿐 아니라 구더기도 직접 다 키웠다. 그 냄새, 시각적 효과가 다 갖춰져 있으니 배우는 그대로 다 카메라 앞에서 표현할 수 있는 거다. 그게 굉장히 놀라웠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안 나오면 그냥 기다려주신다. “내가 원하는 연기는 이런 거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니 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연출이 배우에게 A를 원하는데 배우가 그걸 못 찾는 경우엔 힘들어진다. 근데 나홍진 감독님은 자신이 A를 원하더라도 배우가 나름대로 합당한 연기를 해서 B를 표현하면 오케이 하시더라. 영화를 하면서 너무나 많은 공부와 경험을 한 것 같다. 감독님도 그렇고 곽도원씨에게도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아서, 함께 해서 영광이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Q 영화에서 배운 것들이 무대에서도 자극이 되겠다.
당연하다. 꼭 <곡성>뿐 아니라 이제까지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 느끼게 된 건데, 이삼 십대였을 때 몰랐던 것들이 지금은 보인다. <라이어>가 시추에이션 코메디가 아닌가.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연극은 카메라로 찍어두었다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번 배우의 상태도 달라진다. 전체 에너지가 10이라면 그 중 3이 나오는 날도 있고 8이 나오는 날도 있다. 예전엔 그런 걸 못 느꼈는데 요즘은 상대배우를 보면 “아, 쟤가 오늘은 에너지가 3이 나오고 있구나, 무슨 일이 있나 보다”가 느껴지고, 거기에 따라 내 연기도 달라진다. 전에는 매번 똑같은 호흡, 똑같은 세기로 연기를 했는데 지금은 상대방에 맞춰서 연기를 한다. 30대 초반부터 <라이어>를 했는데 30대 후반부터 그런 느낌이 왔던 것 같다.

Q <라이어>를 10년 이상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 작품에 출연하면 지겹거나 매너리즘에 빠진 적도 있었을 것 같은데.
잠깐 빠졌었다. 삽 십대 초 중반에 스탠리 가드너 역을 했을 때였다. 근데 <라이어>를 오래해서가 아니라 상대 배우 때문에 못 해먹겠다는 거였다. 그때는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게 아집이었다는 걸 지금은 인정한다. 이제는 오히려 친구나 후배들한테 ‘어때?’하고 물어보고 “여기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라는 대답이 나오면 바로 그게 내 마음 속에서 수정이 된다. 그리고 <라이어>를 처음 하는 배우들이 오면 ‘맞아, 저렇게 할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거기 맞춰서 내 연기도 달라지는 거다. 10년 동안 같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달라질 때마다 내 연기도 달라지니 얼마나 재미있겠나. 내가 몰랐던 호흡, 새로운 것들을 찾을 때 희열을 느끼는 거다. 또 <라이어>가 이렇게 장기공연을 하는 이유가 분명 있지 않나. 대본 자체가 너무나 탄탄하다. 그러니까 이 좋은 대본을 갖고 매번 다른 공연, 다른 배역을 만나는 것 같아서 너무 재미있다.

내가 후배들을 혼내는 것이 하나 있다. 힘들다고 하면 혼낸다. 힘들다, 못해먹겠다는 얘기를 하면 선배든 후배든 친구든 당장 때려치우라고 한다. 배우라는 직업을 부모님이 시켜서 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여기 왔을 거다. 자기가 원해서 왔는데 힘들다는 소리가 왜 입밖에 나오는지 모르겠다.

Q 힘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건가?
딱 한 번 있었다. 이십 대 초반인데, 그때는 선배들이 ‘빠따’를 때릴 때였다. 선배들한테 맞고 술 먹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데 라디오에서 “서울이 싫어 싫어졌어요~” 하는 김수희 노래가 나오더라. 그걸 듣고 갑자기 택시 기사님한테 “전주 가주세요” 해서 집에 내려갔다. 그때 한번 집에 내려가서 “엄마 나 안 할래~”하고 투정한 적 이후로는 없다. 그때도 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왜 이걸 맞아가면서 하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Q 배우를 꿈꿨던 건 언제부터인가. 
어렸을 때부터였다. 시골에서 자랐는데, 집에 TV가 없었다. 국민학교 시절이었는데 학교에서 반공영화 같은 걸 틀어주면 그걸 보면서 나도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6남 1녀 중에 끝에서 두 번째로 태어났다. 그러니 얼마나 천대와 괄시를 받았겠나(웃음). 거기서 먹고 살려면 귀여움을 떨어야 했다. 고등학교 때 “엄마 나 연극영화과 갈 거야” 했더니 선뜻 그러라고 하시더라. 때리고 가둬놓고 하실 줄 알았더니 “사업하는 놈도 있고, 공무원도 있고 너 같은 놈도 있으면 좋겠다.” 하시는 거다. 

연극하면서 가끔씩 형들을 찾아가 술을 사달라고 한다. 돈 달라고 찾아가는 거다(웃음). 알다시피 연극하면 생활이 힘들다.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이 부자가 아니고, 형제들도 각자 먹고 살기 힘들다. 그런데도 그 와중에 나한테 조금만 적선해주세요, 하면서 살았다. 누나와 형들이 십시일반 도와줘서 버텼다.

연극이 제일 힘든 게 뭔지 아나? 한 달 생활을 버티기가 힘들어서 힘든 거다. 연습이 힘들고 공연이 힘든 게 아니라 연극을 하려면 방값 내고 통신비 내야 하는데 그게 힘들다는 거다. 그래도 나는 후배들한테 힘들다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한다. 새벽에 주유소 일 하고 세차장 일 해, 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해왔다. 한번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서 하는 거지, 힘들다고 하면 안 된다.

Q 그 동안 연극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이나 관객이 있다면.
선물을 준 팬이 기억에 남는다. 캐리커쳐를 그려서 편지와 함께 주셨는데, 그 글이 너무나 맘에 들었다. 자기가 정말 인생이 힘들어서 <라이어>를 보러 왔는데, 원래 코미디를 봐도 잘 안 웃는 분인데 처음엔 피식거리면서 공연을 보고, 두 번째는 크게 웃으면서 보고, 세 번째는 울면서 보고, 그렇게 일곱 번을 봤다고 하더라. 그래서 너무 고마웠다고. 5~6년 전에 받은 편지인데 아직도 그 글이 생각난다. 그리고 지방공연을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공연 중간에 떡이나 물 같은 걸 던져주신다(웃음). 추억이 많다. 만약 내가 칠팔십 살 되어서 인터뷰를 할 때 어느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라이어>일 것이다. 

Q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은.
배우는 내 직업이다.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의 목표가 뭐겠나. 그 일을 잘하는 것이다. 나도 배우로서 내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게 목표다. 그런 말을 못 들을 거면 이걸 할 이유가 없다. 연기를 잘하는 게 우리한테는 일 잘하는 거다. 내 일을 잘 하고 싶다,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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